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김재규가 박정희보다 강경했다? ==== 일각에서는 만약에 김재규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김재규는 스스로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정권을 넘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최고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을 것이며 김재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대통령을 시해한 살인자라는 비난과 자신을 총애한 박정희를 죽인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 여론을 억압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아주 가혹한 독재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김재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YH 사건]] 당시 김재규의 태도에 대한 증언을 예로 든다. 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정섭은 YH사건과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김정섭은 김재규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에 대해 박대통령보다 더 강경한 탄압 수단인 긴급조치10호를 건의했다가 대통령에 의해 거절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제세한 진술을 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또 이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긴급조치 10호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 그 진술 내용은 김정섭의 진술과 일치했다.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보다 더 강한 10호를 강구했고 박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어 [[김계원]]과 김정섭 두 사람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이 현실과 일치하고 그 진술 내용들은 한결같이 김재규가 박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강경하고 탄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김재규가 만약 정권을 잡았다면 박정희보다도 더욱 잔혹하고 엄격한 독재정권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일화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김재규가 박정희보다 강경했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나 민주화 이후 당사자들의 증언 중에는 이와 매우 상반된 증언들이 많다. >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더 강경한 입장이었고 중정이 신민당에 대해 강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신민당사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중정 소관이었지만 차지철도 관련사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것이다” >김계원, 진술조서(2007. 6. 2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59~60쪽 > “'''차지철 경호실장은 모든 걸 강경하게 나가. 김재규 부장은 무언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하고, 그런데서 마찰이 생기는 거지. 그런데 대통령은 차지철한테 더 힘을 실어주는 거야. 차지철 말에 더 귀를 기울이니까'''”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59쪽 > “‘YH 여공 강제해산 작전은 차지철이 시경국장 이순구에게 지시하여 작전이 지시된 것이다’라는 말이 당시 파다하게 퍼져 있었는데, '''그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일례로 차지철은 ‘국회의원들을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는 말도 하였다'''” >----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남재희, 남재희, 전화통화결과보고서(2007. 7. 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60쪽 > “김부장(김재규)이 각하에게 ‘정치도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이번 회기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국외 여론도 지극히 좋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차실장은 ‘나오기만 하면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김계원 피의자신문조서(1회) , 김재규 등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등 피의사건 수사기록철 , 1979.11. 2.)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신민당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있을 무렵 듣게 된 이야기인데, '''당시 신민당 이○○ 정책위원회 의장, 이○○ 등이 차지철에게 포섭되어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을 차지철에게 보고하기도 하여 당내에서는 그들에 대해 ‘사꾸라다’ 하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였다. 아마 그때는 차지철씨가 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YH 강제해산은 차지철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방송 취재기자였던 노○○, (노○○, 2차 진술조서, 2006. 11.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당시 신민당 내부 관계자들 중 당사 앞 가든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농성 중인 '''여공들의 움직임은 물론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까지도 모두 소상히 차지철에게 보고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신민당 관계자들이 있었다'''” >---- >이종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60쪽 >“'''당시 YH사건이 있은 후 신민당 내부관계자 중 첩자가 있었다는 등 당내․외에 소문이 무성하였는데 공공연하게 떠돌던 이야기로는 당시 차지철과 가까웠으며 정책위의 장을 하였던 이○○, 이○○ 의원 등이 거론되었다'''” >----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박권흠, 면담결과보고서, 2006. 9.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60쪽 >김계원은 “진압작전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대책까지 말씀드리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을 것”(김계원, 진술조서, 2007. 6. 26.)이라 하였고, 고건은 “추측컨대 김재규가 보고할 때 김계원이 입회하였을 것”(고건, 진술조서, 2007. 8. 1.)이라고 진술하였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60쪽 >치안본부장은 강제해산 작전점검과정에서 “신민당사에 창문이 많아 추락 위험성이 높은데도 소방서에서 사용하는 안전망이 2개밖에 없어 안전대책이 미비하다”며 강제해산작전을 연기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강제해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였던 김상현 시경부 국장도 “경찰국장에게 ‘야당에 예산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 놔둬도 스스로가 식대다 뭐다 곤란하니까 자연히 내보내도록 조치를 할 텐데…구태여 우리가 끌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조금 그 작전을 연기할 수 있도록 상부에 건의를 해봅시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김상현이 이를 “구자춘 내무부장관에게 건의하자, ‘좋다. 그러나 청와대에 한번 얘기해봐야 할 거다’라고 구자춘이 말하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보고하자, ‘무슨 소리냐, 안 된다. 당장에 작전을 개시하여 전부 끌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하였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61쪽 > ‘강제해산 작전연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김계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및 건의를 하여 재가받은 사항을 안전대책이 미흡하다며 '''연기하겠다는 말을 대통령에게 다시 하기는 어려웠고, 또, 당시 중정이 경호실에 (세력이) 몰려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라고 진술하였고, 고건도 “김재규 부장이 정치적으로 너무 몰려 있어서 서두른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진술하였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2쪽 정작 당사자들 증언을 보면 차지철이 강경파였다고 하며 차지철 때문에 권력이 압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처럼 강경한 작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시 박정희가 김재규보다 온건했다는 주장의 근거도 김계원이 먼저 얘기했지만 민주화 이후 김계원은 다른 주장을 했다. 당연히 전두환의 수사시절과 달리 이때는 고문이 없는 상황에서 나온 인터뷰다.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 상대로 권력을 압박당한 계기는 바로 최태민 사건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된 최태민 관련 인터뷰를 다시 확인해 보자.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__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__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__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__,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__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__ >(중간생략 - 글쓴이) >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__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__ >__(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__ >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__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__ >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__'''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__ >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__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__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__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__.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그 때문에 이미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최태민은 김재규와 차지철 대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김재규 중정의'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2012.10.26'''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5149|#]] 최태민을 원인으로 지적한 날짜에 주목. 박근혜 게이트와 전혀 무관한 시기에도 이미 지적당할 정도로 최태민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하는 상황이었다고 주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